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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 (Ep. 05)  생존자

 

 

5시간 후. 새벽 1시.

 

안개가 자욱한 도로를 따라 목적지에 도착한 황형사는 다시 휴대폰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단축번호 ‘1’번. 이혼한 아내와 함께 사는 딸아이의 휴대폰이다. 가끔씩이나마 아빠에게 전화해주길 기대하며 사준 딸의 휴대폰이건만 매달 배달되는 고지서를 제외하곤 한번도 자신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일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딸아이의 14번째 생일. 생일축하 정도는 해줄 용기가 났는지 황형사는 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오랫동안 울리는 신호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시끄러운 노래소리 속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진희니?”

“누구야? 아빠야?”

“그래 진희야! 좀 시끄러운데 조용한데서 받을 수 없을까?”

“잠깐만! 야, 조용히들 해.”

 

수화기 너머로 계집애들의 노랫소리와 목소리가 변함이 없자, 딸 진희가 노래방 밖으로 나왔는지 한결 조용해졌다.

 

“이젠 좀 조용하지?”

“그래 진희야. 진희야, 생일축하해!”

“치, 말만!”

“무슨 소리야, 아빠가 선물 보냈는데. 아마 집에 가면 아빠선물이 와있을껄!”

“진짜?”
“그럼!”

“우와, 그럼 빨리 집에 가봐야지.”

“진희야?”

“응?”

“가끔씩 아빠한테 전화도 해주고 그래라.”

“... 엄마랑 약속했어. 내가 전화하는 거 엄마가 싫어해서.”

“그래?”

“하지만 아빠가 전화하는 건 받을 수 있단 말야. 아빠가 전화하면 내가 받잖아. 그러니깐 아빠가 항상 전화하란 말야.”

“그래, 알았어. 그럼 오늘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구.”

“응! 담에 또 전화해”

“진희야!”

“왜?”

“아빤 진희 보고 싶다.”

“치. 말만 말구 보러 오면 되잖아. 내가 갈 순 없잖아!”

“그래, 내일 보자. 꼭 갈께. 그래... 응... 끊을께.”

 

황형사는 길게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지난 밤 자신을 호출한 살인사건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전처의 딸인 진희와 함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엄마보다는 딸이 아빠의 부재를 잘 참아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시 합치기는 힘들지 않을까. 자신이 없었다. 아내가 무얼 원하는지, 이젠 서로 지쳤다. 황형사는 멍해진 얼굴을 하고 차에서 내렸다.

 

건물 로비의 불이 거의 꺼져 있어서 실내는 꽤 어두웠다. 엘리베이터 위에 걸린 시계를 통해 1시가 조금 넘은 것이 보였다. 건물의 크기에 비해 드나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다못해 경비원조차 순찰을 나갔는지 자리를 지키지 않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닫힐 때쯤 한 여자가 탔다. 함께 올라가는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13층에서 여자가 내렸다. 희한했다. 13층 복도는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불이 꺼진 상태였다. 하지만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천히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 동안 그녀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황형사는 좀 겁이 나서 기가 죽었다. 드디어 띵 소리와 함께 14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섰다.

 

그런데 당연히 열려야 할 엘리베이터문이 열리지 않았다. 여러번 열림 단추를 누를 때 쿵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엘리베이터를 때리는 파열음이 들렸다. 그제서야 엘리베이터문이 열렸다. 그러나 그것도 주먹 하나 나갈 정도만이 열릴 뿐이었다. 열린 문 밖을 내다보던 황형사는 13층에서 내렸던 여자가 쓱 지나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당황했다. 조금 열린 문을 통해 그녀가 걸어가는 뒷모습이 다시 보였다. 그때 자신의 시선을 느꼈는지, 걸어가던 그녀의 걸음이 뚝 멈춰섰다. 황형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황형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엘리베이터 실내등이 파다닥 안간힘을 쓰다 꺼졌다. 암흑이다. 더구나 이제 엘리베이터는 오픈 버튼을 눌러도, 닫히지도 더 이상 열리지도 않는 상황이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 엘리베이터 안을 잠식했다. 당황한 황형사는 힘으로 자신이 나갈 정도의 틈을 만들었다. 바로 그 때 황형사를 어둠 속에서 내려다보는 붉은 눈빛이 어둠 속에서 깜빡거렸다.

 

조금 전까지와는 너무도 다른 풍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비상등에 비쳐진 복도 풍경은 너무나도 끔찍한 살인의 현장을 쉽게 연상할 수 있을 정도로 핏물이 베어 있었던 것이다. 살해현장에서나 맡을 수 있는 비릿한 피냄새. 바닥에 길게 나있는 핏자국은 피 흘리는 사람을 끌고 간 흔적이리라. 아마도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도망친 사람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살해 당했을 것이다.

 

황형사는 권총 홀스터에서 K9 권총을 꺼내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리고 휴대폰의 단축번호 ‘2’번을 눌렀다. 자신의 파트너인 이형사의 번호였다. 그러나 휴대폰 액정에는 ‘통화지역을 이탈했습니다’란 안내메시지만 뜰 뿐이었다. 어떤 번호도 마찬가지였다. 황형사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반쯤 열린 채 14층에 멈추어섰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어떤 버튼을 눌러도 소용이 없었다. 비상계단도 확인했지만 밖에서 잠긴 듯 열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곳은 완벽한 밀실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리고 자신 앞에는 살해현장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황형사는 핏자국을 피해 천천히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 때.

 

휙!

무엇인가 황형사의 뒷 편을 지나갔다. 황형사는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휴대폰 액정 불빛으로 비쳐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 아니, 있었다. 흔적이 있었다.

 

피 묻은 발자국이 엘리베이터 옆 화장실 쪽으로 듬성듬성 나있었다. 맨 발로 걸어간 핏빛 발자국을 따라 들어가던 황형사는 그 발의 크기가 여자일 것이란 추측을 했다. 역시나 핏빛 발자국은 여자화장실로 나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발자국은 여성화장실 앞에서 뚝 끊어지듯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황형사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여자 화장실로 들어섰다. 총부리를 겨누고 본 화장실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두 개의 칸막이 중에 하나는 반쯤 열려 있었다.

 

천천히 다가간 황형사는 반쯤 열려진 화장실 칸을 확인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닫혀있던 남은 화장실 칸을 확인하려는 순간 황형사는 자신의 가슴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함께 떨어진 휴대폰 액정의 불빛을 통해 한 여자의 발이 비쳐보였다. 자신 앞에 보이는 발은 아마도 이곳의 마지막 남은 생존자의 것이거나, 아니면 살인자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엄청난 차이에 따라 자신이 다시 깨어날 수도 영원히 잠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눈앞이 까맣게 어두워졌다. 황형사는 어디서 들리는지 확인할 수 없는 흐느낌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잃었다.

 

※이 이야기는 2009년 12월31일 밤부터 2010년 1월1일 아침까지 벌어진 공포의 밤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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